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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간주(州) 웨인 출생. 자동차왕으로 불리는 세계적인 자동차 제작회사 포드의 창설자이다. 근대적 |
대량생산방식에 의하여 자동차를 대중화하였고 자동차시대를 개척하였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소 |
년시절부터 기계에 흥미를 가져, 학업을 중단하고 15세 때 기계공이 되어 자동차 제작에 몰두하였다. |
1899년까지 디트로이트에 있는 에디슨회사에서 기술책임자로 임하였으며, 경주용차 제작을 위해 회사 |
를 그만두고 1903년 동업자와 함께 자본금 10만 달러로 포드자동차회사를 설립, 1908년 세계 최초의 |
양산(量産)대중차 T형 포드의 제작을 개시하였다. |
1913년 조립 라인 방식에 의한 양산체제인 포드시스템을 확립하였으며 그 밖에 수많은 기술상의 새로 |
운 토대와 계획·조직·관리에 있어서 합리적 경영방식을 도입하였다. 1914년에는 최저임금 일급(日 |
給) 5달러, 1일 8시간 노동이라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노동정책을 폈다. 그의 산업철학은 제품가격 |
의 인하로 판매량을 확대하고, 생산효율을 높이고 생산을 증대하여 가격을 더욱 낮춘다는 단순한 것 |
이었다. |
포드자동차회사는 T형 포드로 미국 최대의 자동차 제조업체가 되어, 1924년에는 시장의 거의 반을 차 |
지하였으나, 강하고 편협한 그의 개성 탓으로 말년에는 경영에 파탄을 가져왔다. 1920년대 말에는 경 |
쟁사인 제너럴모터스사(GM)에 수위를 빼앗기고, 노동조합운동에 반대를 계속하였으므로 경영이 악화 |
되었다. |
저서에 《오늘과 내일 Today and Tomorrow》(1926) 《나의 산업철학 My Philosophy of Industry》 |
(1929) 등이 있다. 1936년에 설립된 포드재단(財團)은 교육진흥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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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포드 ( Henry Ford, 1863-1947, 미국 ) |
현대를 발명한 사나이, 헨리 포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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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살아 갈 사람들에게 '헨리 포드'란 이름이 던져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22세기나 23세기에 |
도 인류가 지구상에 계속 살아남아 문명의 이기를 자랑할 수 있게 된다면 후세 사람들은 20세기를 뭐 |
라고 설명할까? 우리가 뭉뚱그려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 따위로 말하듯 미래의 인류가 |
20세기를 말한다면 뭐라 말할까? |
이에 대해 상상해보는 것, 좀 더 구체적으로는 자신의 삶이 혹시 역사에 기록된다면 어떤 것이 될 |
까라는 상상을 해보는 것은 개인에게나 민족에게나 굉장히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역사를 의식한다 |
는 것 자체가 인생에 대해서 좀더 진지해질 수 있는 하나의 태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
사람들에 따라 약간의 이견은 있겠으나 그 누구도 20세기의 생산양식에 대해서 '대량생산 대량소비' |
즉 포디즘을 무시하고 기술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혹시 중등학교 때나 고등학교 때(지금도 그런 과목 |
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기술>과목을 공부했다면) 테일러주의나 포디즘(Fordism)이란 말 정도는 |
들어봤을 것이다. 미국 자동차 산업의 빅 3(제너럴 모터스, 크라이슬러, 포드) 가운데 하나인 포드는 |
이 사람, 바로 헨리 포드에 의해 설립된 회사이다. |
만년의 헨리 포드와 한 소년 사이에 학교교육에 대한 작은 설전이 벌어졌다. |
존 다링거라는 이름의 소년은 이 노인이 학교교육에 대해 상당히 편협한 시각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 |
다. "할아버지, 이젠 세상이 달라졌어요. 지금은 '현대'란 말이에요."아이의 말을 포드가 잡아챘다. |
"얘야, 그 '현대'를 발명한 게 나란다." <20세기의 사람들/ 상권 58쪽/한겨레신문사/1995> |
현대를 발명한 사내, 헨리 포드. 그에 대한 영화는 아니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 분위기를 느낄 수 |
있는 영화 두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하나는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와 마크 노플러가 음악을 |
맡아서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주었던 영화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라는 영화를 먼저 보시 |
는 것도 헨리 포드에 대한 이번 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일명 '발명의 세기'라고 하는 |
19세기는 산업혁명을 뒷받침할 만한 수많은 발명품들이 쏟아져 나왔고, 자동차라는 물건 역시 이 시 |
기의 산물이었지만 아직까지 자동차는 일부 괴짜 발명가들이 자신이 개발한 자동차 점잖게 앉아서 귀 |
부인들과의 피크닉 정도에 이용하는 물건이었다. 이 때의 사람들은 누구도 '말 없는 마차'에 불과한 |
자동차가 20세기의 지구를 온통 뒤덮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19세기가 끝나가고 있던 1896년 초여름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자신의 집 창고를 개조한 실험실 |
에서 포드는 최초의 포드 1호를 끌고 모두가 잠든 새벽의 거리로 나왔다. 자전거 바퀴에 4륜 마차의 |
차대를 얹고 자신이 직접 만든 2기통짜리 휘발유엔진을 장착한 이 자동차가 인류의 새로운 발이 되어 |
줄 것이란 사실은 아마 포드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
1903년 포드가 디트로이트의 중소자본가들의 자금을 모아 포드 자동차 회사를 설립했을 때, 이곳에는 |
50여 개 이상의 자동차 회사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포드가 이들과 달랐던 점은 자동차가 미래 |
의 주요한 운송수단이 될 것이며, 자신의 발명품을 몰고 다니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그는 자동차의 생산과 소비에 대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기획이 있었고, 그것이 바로 포드 자동차 회사 |
가 다른 자동차 회사들과 다른 점이었으며 동시에 '현대'의 출발점이었다. 다른 자동차 회사들이 이 |
새로운 탈것인 자동차를 유한계급의 유희용으로 제공하고 있을 무렵, 포드는 자신의 자동차를 저렴한 |
가격에 누구나 구입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공언했다. |
19세기 중엽 연장 몇 개만 챙겨들고 아일랜드에서 �겨나듯 이민 온 농부(19세기 중엽 아일랜드는 ' |
감자마름병'이란 재해로 인해 주식이었던 감자 대기근을 겪었다. 당시 영국은 아일랜드에 대한 원조 |
를 하지 않아 수많은 아일랜드인들이 굶어죽었고, 수많은 아일랜드인들이 굶주림을 피해 대서양을 건 |
너 신대륙 미국으로 건너갔다. |
얼마전 영국의 블레어 총리가 이때의 과오에 대해 아일랜드 국민들에게 사과하였다. 좀더 자세한 내 |
용은 <아일랜드 대기근/ 시공디스커버리 총서 63/ 1998년>을 참조하시길)의 손자이자 미국에서 농사 |
지을 땅을 얻은 것만으로도 행복해 했던 아버지 윌리엄은 포드를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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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형 자동차의 생산과 포드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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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T형 포드를 앞지를 수 없다. 아무리 달려도 그 앞엔 또 다른 T형 포드가 있기 때문이 |
다.' 그도 그럴 것이, 1924년 무렵에는 약 천만대의 T형 포드가 미국의 전도로를 굴러다니고 있었으 |
니 미국의 어느곳에 가도 T형 포드가 보이지 않은 곳이 없었다. |
포드가 최초의 T형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하던 1908년 당시 다른 자동차 회사들의 자동차 값은 평균 |
2천 달러 정도였다.(물가인상율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일반인들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가격이다) |
그러나 포드는 이때 T형 차를 8백 25달러에 팔았다. 그후 가격은 더욱 떨어져 3백달러 미만의 가격으 |
로 판매되기도 했다. 포드는 어떻게해서 이렇게 싼 가격이 자동차를 공급할 수 있었을까? |
포드 이전까지의 자동차가 장인들에 의해 수공 생산되던 수공품이었다면 포드는 대량 생산과 생산기 |
술 혁신을 통해 자동차를 공산품으로 생산해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노동자들이 공구를 들고 작업 |
대로 찾아가 제품을 만들고 조립해왔지만 포드에 이르러서는 컨베이어 벨트가 끊임없이 생산조립품을 |
실어나르고, 노동자들은 나눠 받은 작업동작을 온종일 반복하는 풍경이 일상화되었다. |
지금으로서는 이런 광경이 저녁 뉴스 시간대마다 언젠든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당시로서는 혁명적 |
발상이었다. 이전부터 자본가들은 노동과정을 좀더 세분하고 재조직하는 철저한 분업을 통해 생산을 |
독려하고 좀더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노동자를 독려해왔다. 노동자 한 명 한 명에게 단순동작을 |
맡기고, 그 작업을 독려하도록 한 테일러주의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포드는 그런 독려의 과정을 사 |
람이 아닌 컨베이어벨트에 맡기도록 하였다. |
대규모 공장 단지와 전용기계 등을 이용한 대량생산 시스템은 이후 점차 미국이란 사회의 구조까지 |
바꿔나가게 된다. 현재 전세계를 주름잡는 미국의 대기업들과 수많은 체인 사업들의 밑바탕에는 형태 |
는 많이 달라지고 변형되었지만 이런 '포드주의'가 그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
(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맥도날드 햄버거(레이 크록)의 맥도날디즘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도록 하 |
겠다) 이른바 '규모의 경제'는 원가절감의 기획을 원료부터 판매까지를 장악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
헨리 포드의 이런 컨베이어 벨트에 의한 노동 통제 시스템은 노동자 자신을 노동으로부터 소외되 |
도록 했다. 더 이상 노동자는 장인일 수없고, 자신이 생산하는 제품의 부품처럼 되어갔다. 이런 식의 |
현대를 간파한 이가 찰리 채플린이었고, 그의 영화 <모던 타임즈>는 포드주의가 노동자의 시간과 동 |
작을 컨베이어벨트에 의해 중앙통제하고, 노동자라 불리는 인간을 결국 부속품처럼 소모하고 있다는 |
사실을 갈파한다. |
한편 헨리 포드는 이런 생산시스템으로 인해 생긴 생산비 절감의 효과를 노동자들에게 나눠주겠다고 |
선언하고 1914년부터 노동시간을 하루 9시간에서 8시간으로 줄이고, 당시 동종업체의 평균임금 수준 |
이 2.34달러였던 때에 하루 최저임금을 5달러로 인상한다. 많은 노동자들이 이른바 '포드맨'이 되기 |
위해 장사진을 쳤고, 포드는 그들 가운데 우수한 인력만을 골라 쓸 수 있는 여유를 즐겼다. |
보수 우파들은 그를 사회주의자라고 몰아붙였지만 정작 포드 자신은 "인도주의란 아무런 쓸모가 없는 |
것"이라고 말했다. 분명 포드 자신은 남북전쟁을 통해 부를 축적한 미국 동부지역의 부호들과는 달랐 |
다. 그는 스스로 늘 아일랜드 출신 농부의 아들이자 노동자라고 생각하고 공언했으며 술과 담배와 사 |
치를 멀리했고, 금융수입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경멸했다. |
그러나 그의 외아들 에드셀은 디트로이트에서 백화점을 경영하고 있는 부호의 조카딸과 결혼했고, 그 |
의 아내는 상류사회의 호사를 즐겼다. 그리고 그는 노동조합을 극도로 싫어했다. |
그 자신이 높은 임금과 복지시설을 제공하고 있는 마당에 (국내의 모 그룹처럼)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
자 하는 노동자들을, 스스로 노동자라고 생각한다던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사업장에는 '사업 |
자의 첩자가 포드자동차만큼이나 많다'는 말이 있었을 만큼 노동자들을 통제하고, 심지어 '봉사부'라 |
는 전과자들로 조직된 부서(일종의 '구사대')를 두어 노동자들의 침묵을 강요했다. |
회사 밖에는 '검은 부대'라는 집단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살인과 고문, 집단 |
린치를 자행하며 노동조합의 결성을 막았다. 앞서 이야기한 영화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
나 영화 <호파> 등을 보면 이 시기의 자본가들이 노동자에게 자행하던 폭력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
결국 포드에도 노동조합이 생겨났지만 미국의 자동차 업계 빅 3 가운데 가장 늦은 것이 되었고, 이 |
런 포드의 고집스러움은 T형 자동차 생산만을 고집하여 다양한 차종으로 다양한 계층을 파고든 제너 |
럴 모터스에 의해 추월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이후 포드가 숨질 때까지 포드는 제너럴 모터스 |
에 뒤집힌 순위를 역전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헨리 포드가 현대에 남긴 유산은 지대한 것이었다. |
그는 최초로 노무관리를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에 맡긴 기업가였으며, 노동조합을 탄압하기 위해 폭력 |
조직을 만들었고,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스템을 통해 자원의 고갈과 빈부의 격차, 환경파괴의 주요원 |
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이 어찌 헨리 포드의 잘못이라고만 하겠는가? |
그러나 헨리 포드는 이런 모든 문제들의 시작을 만들어 낸 인물이기는 하다. 세계 초강국 미국의 그 |
압도적 힘의 바탕에는 이름 없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희생과 제3세계 민중들의 울분 속에서 형성된 것 |
이기 때문이다. |
(그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헨리 포드에 대한 자료들 거의 대부분이 '성공시대 |
' 풍의 글들이었다. 성공시대를 볼 때마다 기만적인 프로그램이란 생각이 드는 필자의 입장에서 보자 |
면 헨리 포드에 대한 시각 역시 좀더 교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
현재 디트로이트 시의 헨리 포드 기념관에 '헨리 포드는 꿈을 꾸는 사람이었고 그의 아내는 믿음의 |
사람이었다'는 명구가 기록되어져 있다고 한다. 헨리 포드가 정말 꿈을 꾸는 사람이었는지 아닌지는 |
난 모르겠다. 그러나 그 꿈이 우리 모두의 삶에 정말 복된 것이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은 각자의 몫이 |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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