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의 길

위인들

2000 머털도사 2007. 11. 14. 13:55
1.이순신
2.세종
3.이황
4.안창호
5.신사임당
6.광개토황
7.허준
8.원효
9.주시경
10.을지문덕
11.황희
12.장보고
13.김유신
14.성삼문
15.왕건
16.강감친
17.전봉준
18.안중근
19.이이
20.김정호
21.정약용
22.최무선
23.이상재
24.이성계
25.유정
26.김구
27.지석영
28.김옥균
29.우장춘
30.유관순
먼저 삼국 시대..
주몽 : 고구려를 세운 시조로서 동명성왕이라고도 함. 백제를 세운 온조가 주몽의 아들 로서 2 대왕 유리의 이복동생이다. (어머니가 서로 다르다...)
광개토대왕 : 우리나라 사람 중에 아마 이 분 모르시는 분은 없을 겁니다.  5세기 때 우리나라의 전성기로 만들어셔서 서쪽으로는 후연을 무찌르고 동쪽으로는 거란, 남쪽으로는 백제, 왜구를 무찌르신 우리나라의 짱!!입니다.
계백 : 황산벌에서 김유신 장군의 5만대군과 단 5천명을 이끌고 용감하게 싸우신 장군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화랑 관창의 활약 때문에 패배한 백제의 마지막 충신...
김유신장군 :  신라의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은 장군으로서 김춘추와는 사돈 관계입니다.
고려시대...
태조 왕건 : 고려를 세운 시조로서 견훤을 무찌르고 덕으로 나라를 다스려서 후삼국 통일을 이룬 왕..
광종 : 태조 왕건의 아들로서 제 4대왕으로 과거제도와 노비 안건법을 실시한 훌륭한 왕이죠....
강감찬 : 거란을 여러 차례 무찔른 장군으로서 귀주대첩으로 유명하고 이분이 태어날 때 별이 떨어진 곳이 낙성대라죠???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 : 우리나라를 지킨 무적의 챔피언!!! 드라마로도 나오셨죠? 한산도 대첩으로 유명하고 학익진으로 왜군을 무찔렀습니다. 이 분이 남긴 유명한 말..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
정약용 : 우리나라의 뛰어난 실학자로서 수원 화성을 거중기로 이용하셔서 지으셨고요. 호는 다산입니다...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지내며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바다를 제패함으로써 전란의 역사에 결정적인 전기를 이룩한 명장이며, 모함과 박해의 온갖 역경 속에서 일관된 그의 우국지성과 고결염직한 인격은 온 겨레가 추앙하는 의범(儀範)이 되어 우리 민족의 사표(師表)가 되고 있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문무왕:
신라 제30대 왕 (661~681 재위).이름은 법민(法敏). 제29대 태종무열왕의 장자이며, 어머니는 김유신의 여동생 문명왕후(文明王后)이다. 태종무열왕의 왕위를 이어받아 재위기간 동안 백제저항군의 진압, 고구려 정벌, 당나라 군대의 축출 등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비는 파진찬(波珍飡) 선품(善品)의 딸 자의왕후(慈儀王后)이다. 〈삼국사기〉에는 왕의 외모가 영특하게 생겼으며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고 전한다. 진덕왕 때 당나라에 가 있기도 했으며, 태종무열왕 때 파진찬으로 병부령(兵部令)이 된 뒤 곧 태자로 봉해졌다.
을지문덕:
〈자치통감 資治通鑑〉에는 위지문덕(尉支文德)으로도 되어 있다. 살수대첩(薩水大捷)을 승리로 이끈 고구려의 장군으로만 알려질 뿐, 개인과 관련된 사실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어떠한 문헌에 근거했는지 알 수 없지만, 〈해동명장전 海東名將傳〉에 그가 평양 석다산(石多山) 사람이라고 전한다. 을지문덕의 성인 '을지'에 대해서는 고구려 관등 우태(于台)와 같이 연장자나 가부장을 뜻하는 것으로 풀이하기도 하고, '을'만을 성으로 보기도 한다. 또 선비족 계통의 성인 '위지'(尉遲)와 을지를 같은 것으로 보아 고구려로 귀화한 선비족 계통의 사람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권율:
본관은 안동.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 아버지는 영의정 철(轍)이고,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이다. 이항복(李恒福)의 장인이다. 46세 때인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이어 전적·감찰·예조좌랑·호조좌랑·전라도도사·경성판관(鏡城判官) ·의주목사 등을 두루 지냈다.
유성룡:
임진왜란중 민정(民政)·군정(軍政)의 최고관직을 지내면서 전시 조정을 이끌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위기에 빠진 조선왕조를 재정비·강화하기 위한 응급책으로서 각종 시무책(時務策)을 제기했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운암(雲巖).
왕건:
고려의 제1대 왕(918~943 재위).
뛰어난 정치력과 덕망으로 고려왕조 창건과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루었다. 이름은 왕건(王建). 자는 약천(若天). 송악(松嶽:개성) 출신이다. 아버지는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이고,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최치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 아버지는 견일(肩逸)로 숭복사(崇福寺)를 창건할 때 그 일에 관계한 바 있다. 경주 사량부(沙梁部) 출신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본피부(本彼部) 출신으로 고려 중기까지 황룡사(皇龍寺)와 매탄사(昧呑寺) 남쪽에 그의 집터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최치원 자신이 6두품을 '득난'(得難)이라 하고, 5두품이나 4두품은 "족히 말할 바가 못 된다"라고 하여 경시한 점과, 진성왕에게 시무책(時務策)을 올려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등인 아찬(阿飡)을 받은 점 등으로 미루어 6두품 출신일 가능성이 많다.
김좌진:
만주 무장독립군의 총사령관으로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해외 민족유일당 운동을 전개했다.
황희:
조선 초기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노력한 유능한 정치가일 뿐만 아니라 청백리의 전형으로서,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재상으로 꼽히고 있다. 본관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尨村). 아버지는 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使) 군서(君瑞)이다. 1376년(우왕 2) 음직(蔭職)으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고, 1383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1389년(창왕 1) 문과에 합격했고, 이듬해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이 되었다.
진흥왕:
신라 제24대 왕(540~576 재위).대대적인 정복사업을 통해 신라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시켰으며, 불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름은 삼맥종(三麥宗)·심맥부(深麥夫). 아버지는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이며,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 김씨이다. 왕비는 박씨 사도부인(思道夫人)이다. 7세 때 즉위하여 법흥왕비가 섭정했다. 551년(진흥왕 12) 법흥왕대에 제정된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고쳐 개국(開國)이라 했는데, 이때부터 진흥왕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뒤 568년에 대창(大昌), 572년에 홍제(鴻濟)로 연호를 고쳤다.
안중근:
1907년 이전에는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 등 계몽운동을 벌였고, 그뒤 러시아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1909년 초대조선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조선침략의 원흉으로 지목하여 하얼빈[合爾濱]에서 사살했다. 본관은 순흥(順興).
서희:
고려 초기의 정치가.본관은 이천. 자는 염윤(廉允). 아버지는 내의령(內議令)을 지낸 필(弼)이다. 할아버지 신일(神逸) 때까지는 이천 지방의 토착 호족이었다가 아버지에 이어 자신도 재상에 오르면서 중앙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했고, 뒤이어 그의 아들 눌(訥)과 유걸(惟傑)이 각각 문하시중(門下侍中)과 좌복야(左僕射)를 지냈을 뿐 아니라 눌의 딸이 현종의 비가 됨으로써 고려 사회의 주요 문벌귀족세력이 되었다.
조광조:
중종 때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주창하며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시행했으나, 훈구(勳舊) 세력의 반발을 사서 결국 죽음을 당했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강감찬
 강조의 난을 트집잡아 침입했던 거란군을 하공진으로 하여금 설들하도록 해 물러가게 하였으며, 현종 9년에 소배압이 10만의 거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을 때, 도원수가 되어 귀주에서 섬멸하였다.  [귀주대첩]               
도원수 -  전시에 군대를 모두 거느리던 임시 장수
논개
기생으로 꾸미어 적장에게 술을 권하고 왜장 게다니가 춤을 청하자, 이기회를 이용하여 그를 절벽 위의 바다로 유인하여 목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해 왜장과 함께 죽어, 나라를 위해 한 목숨을 바쳤다.
[이 바위를 '의암'이라 부른다]
단군
환웅과 웅녀사이에서 태어 났으며, 환웅의 뒤를 이어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고 아사달(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오랫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문익점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목화씨를 붓대 속에 숨겨 무사히 국경을 넘어 들어와 이것을 전국에 퍼뜨려 고려인들의 의생활에 큰 변화를 주었다.
방정환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이기도 하며 1922년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출판하였으며, 윤극영, 손진태 등과 색동회를 조직하고 그 해 5월 1일을 첫 어린이날로 정하였다.
세종대왕
집현전을 설치하여 젊은 학자를 모았으며, 도성을 고쳐 쌓고 두만강 방면에 6진, 압록강 방면에 4군을 설치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고, [농사직설]을 편찬케 하여 농업 발전에 공언하고, '훈민정음' 28자를 창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