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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2000 머털도사 2007. 11. 14. 14:01
마르크스:1818년에서 1883년까지
마르크스주의를 창시한 독일의 경제학자
종전의 공상적 사회주의에서 과학적 사회주의를 창시한 카를 마르크스는 1818년의 독일(당시는 프로이센)의 트리어에서 부유한 유태인 변호사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1824년에 전 가족이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여 신교도가 된 그의 부친은 아들을 자기와 같은 법률가로 만들기 위해 마르크스가 18세 때 본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그 후 베를린으로 전학, 법률학과 철학 그리고 역사학을 수학하도록 하였다. 
마르크스는 헤겔학파의 좌파 사람들과 친교를 맺으며 차차 무신론적 급진 자유주의자가 되어 갔다. 1841년 예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18442년 1월에 창간된 라인주의 급진적 부르주아의 기관지 '라인신문'의 주필로 활약했으나 그 신문은 당국의 간접적 탄압을 받아 곧 폐간되었다.
1847년 여름 정부 고관의 딸과 결혼하여 곧바로 프랑스 파리로 옮겼으며 그곳에서 아르놀트 루게와 함께 '독불연지'를 출판하였다. 그는 1842년에 한번 만난 적이 있는 엥겔스와 재회하여 상호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때로는 정치적 의견을 상호 기탄 없이 교환하는 사이로서 그들의 우정은 일평생 지속되었다. 
1845년 마르크스는 엥겔스와의 첫 번째 공저 '신성가족'을 출간하여 헤겔 좌파 사상을 비판했다. 그해 마르크스는 파리에서 추방되어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로 가서 공산주의자 동맹에 참가하여 활약하던 중 '독일 이데올로기', 1847년에 '철학의 빈곤'등을 출간했으며 그 다음해에 유명한 '공산당 선언'을 발표했다. '공산당 선언'은 그 전년인 1847년 6월에 영국 런던에서 결성된 국제적 혁명 조직인 '공산주의자 동맹'의 강령적 문서로서 발표되었으며 엥겔스와 함께 집필한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지금까지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라는 점과 프롤레타리아(노동자)계급의 형성에 대해 설명하고 계급투쟁에 의한 자본주의 사회의 붕괴와 공산주의 사회의 필연적인 실현을 명시했다. '공산당 선언'은 이후 세계 혁명의 고전이 됨과 아울러 세계 혁명 운동가의 지침서가 되었다.
마르크스는 독일의 3월 혁명(1848년 프랑스의 2월 혁명에서 영향을 받아 3월에 독일 각지에서 발행한 혁명) 때 쾰른에 잠입하여 신문을 창간하여 비혁명적 중산 민주 정당을 비판했다. 혁명이 진압되자 마르크스는 다시 추방되어 파리를 거쳐 영국 런던에 영주하게 된다. 
1851년부터 1862년까지 미국의 '뉴욕 트리뷴'지에 시사 문제에 관한 기고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경제학연구에 몰두하여 1859년에 '경제학 비판'을 탈고하고 1867년에 유명한 그의 저서 '자본론' 제1권을, 1885년에는 제2권을, 그리고 1894년에 제3권을 각각 출판했다. 이 '자본론'은 그의 망명처인 런던에서 재개한 그의 경제학 연구의 집대성이며, 공산주의 사상의 바이블로 간주되었다.
'자본론'은 자본주의 사회라는 특정 사회의 경제적 분석으로서 그는 이를 첫째 자본의 생산 과정, 둘째 자본의 유통 과정, 셋째 자본주의 생산의 총과정 순서로 전개했다. 여기서의 핵심적 문제는 자본주의 생산 관계의 일반적인 기초를 전제로 한 상품 생산에 있어서의 인간 관계와 생산 관계이다. 그 해명을 통하여 자본주의 생산의 모순된 초기적 형태가 포착된다는 것이다. 
또 마르크스는 자본을 가치의 운동체 개념으로 파악했다. 자본을 토지, 건물, 기계 설비, 인적 자원이라는 생산 요소의 집합으로 포착하는 경우에는 자본 운용의 성과인 이익은 운용자(자본가, 경영자) 자신의 수완이나 재능에 귀속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가치는 어느 때는 화폐, 어느 때는 생산 수단이나 노동자, 또 어느 때는 상품의 모습을 취하는 것과 같이 여러 가지 형태의 변화를 되풀이하면서 그 형태 변화, 즉 운동 안에서 자기 증식을 한다고 했다. 이와 같은 가치의 운동체가 자본이라고 했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쓰고 있을 때의 런던 생활은 세 아이를 부양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어 너무나 비참했다. 그의 아내 예리의 헌신은 눈물겨웠으며 친우 엥겔스의 물심 양면의 도움으로 그래도 마르크스는 대영제국의 박물관과 도서관에 다니면서 동서 고금의 경제학과 역사학을 섭렵하여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독파하고 이를 분석하여 앞서 말한 '자본론' 제1권이 1867년에 출간되었지만 제2권, 제3권은 마르크스가 속간 준비중에 사망했기 때문에 그가 남긴 초고와 노트에서 남긴 자료를 기초로 하여 엥겔스가 편집하여 발간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진정한 우정으로 얽힌 형제 이상의 친구였다.
'자본론'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까지 소급할 수 있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는 자본주의 사회의 해악에는 민감하지만 그것을 제거하는 데는 열의적이기는 하나 관념적이며 영원한 정의나 신의 섭리에서 구하기 때문에 현실과는 유리된 결과로 끝난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의 존재와 계급 투쟁의 전망을 갖지 못한다. 
이에 반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장하는 과학적 사회주의는 사회의 발전을 모순의 발전으로 보고 과학적으로 분석, 자본주의 사회의 내부적 모순에 의한 붕괴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장한다. 즉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사명을 실행함에 있어 공상적 사회주의와 다른 점은 자본주의의 내부 모순을 극복하는 가능성을 프롤레타리아 자신 안에서 계급 투쟁의 필요성으로 표출한 점이다. 
마르크스의 유물 사관에 입각한 공산주의 사상을 현실 정치에서 실현시킨 레닌은 마르크스를 19세기의 3대 정신적 조류인 독일의 고전철학, 영국의 고전 경제학, 프랑스의 혁명적 학설들을 결합한 프랑스사회주의의 계승자임과 동시에 천재적 완성자였다고 말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이외에도 1905년에 1, 2, 3권으로 출간한'잉여 가치 학설사'로도 유명하다. 마르크스가 당시의 자본주의 사회를 토대로 하여 과학적 분석을 했다고 하나 그때는 지금과 같은 우주 과학이나 정밀 과학, 전자 정보 과학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가 말한 과학적 사회주의는 오늘날의 눈으로 볼 때는 역시 공상적 정치 사상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마르크스의 철학과 이상은 헤겔의 관념 철학과 역사학에 경제학을 추가하여 뒤집어 놓은 물질적 세계의 동태적 파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건 마르크스의 여러 저서들은 세계 공산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형성하여 20세기에 있어서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급격한 진전과 폭발적인 혁명의 도화선이 된 것은 사실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20세기 후반기에 들어와서 공산주의를 실제 경험한 나라들이 국가 발전과 국민 복지 향상에 있어서 자유 시장 경제를 토대로 한 자본주의 체제 국가에 패배하여 마르크스의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20세기 내내 그의 사상으로 인해 세계 곳곳에서는 혁명과 소란의 열기가 가실 줄 몰랐다. 
마르크스 사후 1세기 이상 지난 이 시점에 명목상이기는 하나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은 적어도 10억은 훨씬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전 인류 사상 다른 어떠한 이데올로기보다 그 신봉자의 수가 많은 것이며, 공산주의자뿐 아니라 비공산주의자까지도 장차 이 세계는 사실상 마르크스주의가 제압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시대가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데올로기도 그 전성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것 같이 보이지만 결국은 소명해 버리는 것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 왔다. 
공산주의가 오늘날의 세계와 미래의 세계에 거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모두가 인정하지만 공산주의 운동에서 점하고 있는 마르크스의 중요성에는 의문을 갖는 사람이 많다. 그것은 소비에트 체제 붕괴전의 소련 정부의 현실 정치가 마르크스의 철학과 사상을 기초로 하여 관리 . 통제되었다고는 보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헤겔의 변증법과 노동, 잉여 가치를 기틀로 하여 공산주의 이론을 확립했지만 그 이론은 소비에트 붕괴 전의 공산주의 소련 정부의 대외 정책과 국내 정책에서 실제로 큰 영향력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이론을 토대로 공산주의 정부를 세우기는 했으나 이론은 이론이고 현실은 어디까지나 현실 세계라는 방식으로 정부를 운영하여 온 것은 세계가 다 아는 사실이다. 
공산주의는 다음 네 가지 점을 역설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인민을 지배했다. 첫째, 대부분의 노동자는 빈곤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일부의 부자들은 대단히 호사스런 생활을 하고 있다. 둘째, 이러한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한 방법은 사회주의 체제 이외에는 없다. 셋째,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사회주의 체제 확립의 유일한 현실적 방법은 폭력 혁명뿐이다. 마지막으로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 기간에 걸친 공산 독재가 불가피하다. 
그런데 처음의 3개 항목은 마르크스보다 훨씬 이전부터 자주 주장되어 온 것이나 제4항목의 개념은 부분적으로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상에서 유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비에트 붕괴 전의 소련의 독재 체제 유지는 마르크스 본래의 사상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레닌과 스탈린의 실천 철학에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점에서 공산주의에 미친 마르크스의 영향은 실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명목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리하여 그의 철학과 사상에 대한 존경의 마음은 단지 진열창에 놓여 있는 한의 장식품과 같은 것이며 그들 독재자가 자기들의 체제를 만들기 위한 과학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 필요한 꼭두각시와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극단적인 주자에도 약간의 진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너무나도 극단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레닌은 단지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르고자 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르크스의 저서를 읽고 그것을 받아들여 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똑같은 일이 마오 쩌뚱 등 많은 공산주의 지도자에도 해당된다. 공산주의 국가를 현실적으로 이 세상에 세운 실제의 정치가 레닌이 공산주의를 이 넓은 세계의 일부분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삼은 유일한 사람으로서 확실히 중요한 인물인 것과 같이 마르크스도 레닌의 정치 사상에 강한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다른 많은 공산주의 지도자에게도 똑같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세계의 한 부분에 있어서는 중요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할 것이다. 
끝으로 마르크스 경제학 이론에 대하여 학자들은 이론의 치명적인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그의 예언에서는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는 점점 더 빈곤하게 된다고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고 오히려 공산주의 국가 노동자보다 더 풍요롭게 살아가고 있다. 마르크스는 또 자본주의 경제의 본질인 경쟁에 의해 중산 계급은 결국 도태, 배제되어 그 대부분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몰락하며 자본가 계급으로 승진하는 중산 계급은 겨우 헤아릴 정도뿐이라고 예언했으나 현실적으로는 그러한 현상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또 그는 기계화의 발전은 곧 얼마안 가서 자본가의 이익을 감소시킬 것이라고 단정했지만 그의 단정은 틀렸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세계 경제는 진전되고 있다. 
마르크스는 종말론을 세속에 적용했는데 자본주의가 자체 모순으로 붕괴하는 날이 바로 그 날이라고 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본산인 영국과 미국에는 마르크스의 그 날은 결코 오지 않았다. 오히려 공산혁명에 성공했다는 소련이 1990년에 들어서면서 자체 붕괴됐다. 
철학자의 중요성은 그 철학자의 견해가 옳고 그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상이 인간의 행동을 변동시켰는가의 여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위의 논거를 기준으로 판단해 볼 때 마르크스는 비록 그의 사상 체계가 이제 낡아 사라져 가고 있다 할지라도 한 세기를 풍미한 지난날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그는 역시 의심할 여지없이 대단히 중요한 영향을 이 세상에 미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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