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물

케네디

2000 머털도사 2007. 11. 14. 14:01
John Fitzgerald Kennedy (1917-1963)
== 그의 명언 ==
교육의 목표는 지식의 증진과 진리의 씨뿌리기이다. 
공포로 인해 타협하지 말 것이며, 남이 나에게 타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말라
국가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줄 것을 바라기에 앞서,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국가는 시민의 하인이지 주인이 아니다. 
국민이 내일에의 신념을 갖지 않으면 발전은 있을 수 없다. 
그대들의 일생의 일로서 무엇을 하든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무슨 일을 하든 제일인자가 되라. 설혹 하수도 인부가 되는 한이 있어도 세계 제일의 하수도 인부가 되라.  
기회는 누구에게나 있다. 다만 포착하지 못할 뿐이다. 
만일 자유 사회가 가난한 다수를 도울 수 없다면, 부유한 소수도 구원할 수 없다. 
모든 어린이가 평등한 재능, 평등한 능력, 평등한 동기를 가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그들의 재능, 능력 및 동기를 발전시킬 수 있는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만 한다. 
민주주의는 결코 최종적 성취는 아니다. 그것은 지칠 줄 모르는 노력, 계속적인 희생, 그리고 의지에의 소명이요, 필요하면 그것의 방어를 위해 죽으라는 명령이다.
밝은 표정을 하든 험상궂은 표정을 하든, 성의있는 태도로 말하든 거치른 말투로 떠들든, 그것이 그 사람의 능력을 대신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배움이 없는 자유는 언제나 위험하며 자유가 없는 배움은 언제나 헛된 일이다. 
예술은 광고의 양식이 아니라 ,진리의 양식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주가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기에 오르려고 하는 것이다. 
인류가 전쟁을 전멸시키지 않으면 전쟁이 인류를 전멸시킬 것이다. 
정치는 비젼(vision)을 제시해야 한다. 
진보로 통하는 가장 훌륭한 길은 자유의 길이다. 
편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해서는 안 된다. 강한 사람이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케네디-
매사추세츠주(州) 브루클린 출생. 하버드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였으며, 학위논문 〈영국은 왜 잠자고 있었나 Why England Slept〉(1940)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해군에 복무하였는데 그가 승선한 어뢰정이 일본 구축함의 공격을 받아 격침되었으나 정장(艇長)으로서 부하를 잘 구출하여 전쟁의 영웅이 되기도 하였다. 1946년 매사추세츠주 제11구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투신하였으며, 1952년 같은 구에서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53년 《타임 헤럴드》의 사진기자 재클린 부피에와 결혼하였으며, 1957년 《용기 있는 사람들 Profiles in Courage》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1958년 상원의원으로 재선되었으며, 1960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 뉴 프런티어(New Frontier)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미국 국민의 헌신적인 협력을 호소하여 공화당 후보 R.M.닉슨을 누르고 승리하였다. 1961년 미국 역사상 최연소이자 최초의 가톨릭 신자로서 미국의 제35대 대통령이 되었다. 케네디와 닉슨 간의 텔레비전 토론은 미국의 대통령선거운동에 새로운 장을 열어놓았으며,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웅변과 재기를 무기삼아 국민에게 호소하는 방법을 자주 이용하였으며, 또한 기자회견 등에서도 텔레비전을 유효하게 활용하였다. 그러나 내정면에서는 의회와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하여 두드러진 업적을 이룩하지 못하였다. 
(시대적 배경-소련과 미국이 대립하던 냉전시대)한편 외교면에서는 쿠바미사일위기에 즈음하여 핵전쟁의 위험을 무릅쓰고 소련의 총리 N.S.흐루시초프와 대결한 결과, 미국은 쿠바를 침략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대신에 소련은 미사일 ·폭격기 등을 쿠바에서 철수하고, 미국측의 사찰을 인정함으로써 소련과의 극적인 타협을 이루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소련과 부분적인 핵실험금지조약을 체결하였고, 미 ·소 간의 해빙무드가 형성되었다. 또한 중남미 여러 나라와 ‘진보를 위한 동맹’을 결성하였고, 평화봉사단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베트남 개입에도 신중한 태도를 취하였으며, 중국 본토와의 재수교를 재선 후의 최대 과제로 삼았으나, 1963년 11월 22일 유세지인 텍사스주 댈러스시에서 자동차 퍼레이드 중 암살자의 흉탄에 치명상을 입고 사망하였다. 
-케네디가의 저주-
지난 50년 동안 암살,사고,스캔들 등으로 얼룩져온 미국의 명문가문에 불어닥친 불행의 씨앗은 바로 1944년 케네디가의 장남으로 장래가 촉망받던 조셉 p 케네디가 29세의 한참 피어오르는 청춘에 전쟁터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지면서부터 시작되며 이 때부터케네디가는 불행의 덫에 걸리게 된 것이다. 그후 4년만에 케네디 대통령의 바로밑 여동생 케슬린이 또 비행기 추락사고로 불행하게 사망한다.
1963년에는 케네디 대통령의 장남 패트릭 케네디가 태어난지 이틀에 숨지더니 불과 석달만에 다시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는 불행한 운명이 덮쳤던 것이다.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1968년 대통령에 출마했다가 형님의 뒤를 이어 또 암살을 당하게되며 불행의 씨앗은 더욱 불타올라 동생 에드워드 케네디,로버트케네디의 장남인 데이비드 케네디가 죽는 비운을 맞는가 했더니 최근에는(1997년) 로버트 케네디의 자녀 11명중 여섯째인 마이클 케네디가 가족과 스키를 즐기다가 나무에 충돌하는 바에 불행한 죽음을 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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