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의 길

히틀러와 처칠 리더십

2000 머털도사 2007. 11. 14. 13:46
히틀러와 처칠 리더십  
 
조언자 여부가 승패 갈랐다 
평화로운 룩셈부르크에서는 위대한 지도자가 나오기 어렵다” 세계 최초의 리더십학 교수인 존 아데어는 이와 같은 말로 리더십에서 시간과 공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명료하게 정의했다. 처칠에게는 그가 달성한 업적마다 위대함을 최고로 부각시켜줄 나치스 당원이 필요했다. 처칠과 히틀러, 그들에겐 어떤 리더십이 있었을까.



한 사람이 백 사람을 이끈 비결

리더십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권위적인 히틀러 식의 리더십과 선결지명과 영감을 주는 처칠 식의 리더십이다. 히틀러의 경우 첫손가락으로 꼽히는 능력은 대중을 선동하는 웅변술이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이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구영토 수복정책을 부르짓는 지도자를 선택하도록 최면상태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최면술의 비밀은 바로 그의 웅변술이 밑바탕이 됐다.



모름지기 지도자는 배우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히틀러의 생각이었다. 지금처럼 미디어가 발달하기 전 정치가들은 무대를 통해서 국민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호소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군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바바리아 출신 코미디언 바이스 페르의 연기를 배우며 끊임없이 연구했다. 대중과의 일체감을 조성하고 흡인력을 높이기 위해 군가나 깃발의 물결, 폭풍 같은 대규모 군대 행렬, 그리고 극적인 조명 등의 영화적 효과를 집회나 연설에 사용했다.



물론 히틀러에게 연설능력만이 뛰어났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닷, 그는 자신을 보석으로 포장하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처칠도 연설에 능했을까. 오히려 처칠은 눌변에 가까웠다고 평가한다. 처칠은 연설을 몇번 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특수효과와 같은 것도 동원하지 않았다. 그가 좋아하는 장소는 의회나 라디오 방송국처럼 대중과 직접 마주칠 기회가 적인 곳이었다. 또한 처칠은 대중연설의 취약점인 가벼운 말더듬과 혀짧은 소리로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처칠에겐 상대를 설득시키는 토론 능력이 있었다. 그는 히틀러의 선동적인 수법은 없었지만 피나는 연습과 노력에 의존했다. 한창시절에는 몇 년 동안이나 연설원고를 쓰느라 보낼 정도였고, 완벽하다고 생각할 때까지 연설문을 고쳐 썼다. 이러한 노력으로 처칠은 호방하고 자신만만한 문체, 신랄한 위트를 결합한 자신만의 웅변술을 창조해냈다.



강력한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십

히틀러와 처칠의 성격은 완전히 달랐지만 지도자로서 공통점은 많았다. 바로 국민들에게 강력한 비전을 제시했고, 강력한 소시과 고집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정치적인 환경이 바뀌자 많은 추종자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매력으로 작용했다. 히틀러와 처칠이 비전을 제시한 방법은 고상한 이념을 추구하는 방법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처칠은 '현대 민주주의의 정신에 따라 미래를 설계하고 그에 맞는 국가관을 제시한다’는 이상적인 비전이 아니라 우리 영국인의 생존과 대영제국과 그 체제의 영속성”만을 강조하는 방식이었다. 
히틀러도 독일 국민들의 열렬한 애국심을 고취시키는데 힘을 쏟았다. 하지만 그 방식은 부정적인 방법으로 이용됐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의 분노와 적개심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즉 순수 정통 독일인들만이 우수한 민족이라는 의식을 고취시켜 대대로 독일에 뿌리박고 있는 유태인들조차 배척했다. 그럼으로써 '정통 독일인’들의 민족주의를 자극했고 도취하게 만들었다. 인간의 본성상 고상한 비전보다는 감정을 자극하는 비전이 사람들을 뭉치게 만들고 전쟁 속으로 뛰어들게 만들 수 있는 힘일지도 모르다. 그리고 전쟁중에는 더욱 더. 
리더십 테크닉 
히틀러의 리더십 테크닉 중에 가장 효과적인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가 권위를 행사하지 않아도 부하들이 그를 만족시켜줄 만한 업무를 자진해서 수행하는 '총통에 대한 충성’개념을 주입시킨 것이다. 나치 독일에서 유태인 반대운동이 벌어졌을 때, 그의 부하들은 경쟁적으로 유태인을 학살할 '좋은 방법’을 내놓으며 히틀러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히틀러에게 점수를 따기 위해 그의 부하들은 알아서 더 잔혹한 방법으로 (예를 들면 수용소에 가스를 주입해 싼 비용으로 효율을 높이는 등) 유태인 학살에 앞장서게 됐다. 부하들은 자연스레 갈등이 쌓이게 되고, 히틀러는 갈등의 중심에 서서 중재자의 역할을 하면서 더욱 강력한 리더십을 확보할 수 있었다. 히틀러가 부하들에게 리더십을 확보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인 정치나 행정의 자세한 부분에 대해 전적으로 위임했다는 점이다. 자신이 전체적인 목표를 정하고 나면 나머지는 부하들끼리 꾸려가게 내버려뒀다. 
처칠은 이에 반해 남의 일에 시시콜콜 잔소리를 하고 참견하기로 악명 높았다. 또한 자신이 임명한 사람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무자비하게 대했다. 개인적 친분보다 국가의 미래가 먼저였다. 어쩌면 처칠이 이처럼 학연 지연을 벗어나 국익을 앞세웠기 때문에 그의 리더십은 더욱 확고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처칠은 감정이 풍부하고 눈물이 많은 지도자였다.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눈물로 보내는 날이 많았고 국민들 앞에서 감상적이 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오늘날 강조되는 감성리더십을 가진 리더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처칠은 모든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때에도 순순히 인신공격을 받아들였다. 의회 비공개 회의에서도 처칠은 자신의 실수를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끊임없이 남의 탓으로 돌렸다. 
자신의 천재성을 무시하는 장군들 그리고 독일 국민 전체에 책임을 전가했다. 지금의 역사가 이 두 사람에 대해서 정반대로 평가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결국 히틀러의 리더십은 그를 두려워하게 만들 수 는 있었지만 그의 생각을 바꾸도록 조언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처칠은 그를 위해 건설적인 비판을 해주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물론 그러한 조언을 제대로 듣지 않아, 결정적인 실수 (떠나야할 때를 아는 것)를 저지르기는 했지만, 은퇴 후 '역사’를 남겨 노벨상을 수상한 훌륭한 지도자이기도 하다. 
승리의 리더십과 패배의 리더십 
최근 우리나라는 칠레와 FTA(자유무역협정)로 진통을 겪었다. 만약 히틀러와 처칠이라면 어떠한 판단을 했을까. 히틀러라면 협정체결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히틀러는 전쟁 당시에도 동맹을 소홀히 여겼다. 하지만 처칠은 자신이 자존심을 구기면서까지 미국과의 동맹에 심혈을 기울였다. 처칠은 "동맹보다 더 나쁜 것은 동맹을 못 갖고 있는 일”이라며 “결코 니국으로부터 떨어지지말라”는 말을 남겼다. 세계 제2차대전 승리의 요인은 이 한마디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CEO히틀러와 처칠, 리더십의 비밀(휴먼앤북스, 2003)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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