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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秦始皇·BC 247~BC 210)

2000 머털도사 2007. 9. 10. 03:10
진시황(秦始皇·BC 247~BC 210)
진시황(秦始皇·BC 247~BC 210) 그는 폭군이든 영웅이든 간에 동양사에 굵은 한 획을 그은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진시황의 업적 중에 병마용(兵馬俑)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의 불가사의로 통한다. 진시황은 국내에서 사상통제를 위해 분서갱유(焚書坑儒)에 460여명의 선비를 생매장한 폭군으로 알려져 있다. 진시황은 중국에서도 최초로 대륙을 통일한 과업과 통일제국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폭군으로 부각된 이중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진시황은 현재 중국 후대들을 관광으로 ‘먹여 살리는’ 위대한 인물이 되고 있다. VTR에서 본 것과 같이 실제 중국 대륙을 다니다 보면 진시황의 ‘관광 상품화’(商品化)가 많이 진행되어 있다. 진시황의 족적이 가장 두드러진 곳이 ‘창청’(萬里長城)과 병마용이다. 중국 여행을 하는 외국인이라면 맨 처음 발길은 단연 창청이라고 한다. 관광객들은 달에서 유일하게 보인다는 인공 구조물을 직접 목격하고 웅장한 규모에 감탄한다. 관광객들이 주로 안내되는 ‘바다링’(八達嶺) 창청은 명나라 때 개보수 됐었다고 한다. 관광객들은 베이징에서 70km 떨어져 접근이 쉬운데다 보존이 가장 양호한 바다링 창청이 진시황때 만들어진 것으로 착각한다. 약 400년 전에 개 보수된 구조물이 2200여 년 전의 구조물로 오인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관광 가이드들은 창청을 ‘진시황의 업적’에 무게를 두고 장황한 설명을 할 뿐, 중국 역대 왕조들이 북방 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오랜 세월동안 만들어져왔다는 점을 애써 강조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6천km에 달하는 만리장성의 원형은 진시황때 완성됐다. 진시황은 중국 통일 뒤 30만의 군사와 수백만의 농민을 징발하여 대량의 벽돌을 쌓아 현재 창청의 원형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창청은 보하이만(渤海灣)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실크로드의 입구인 간쑤(甘肅)성 자위관(嘉山+谷關)까지 6천km를 내달린다. 창청은 오랜 세월의 풍우속에 많이 유실 된데다 오지의 경우 농민들이 집에 가져다 주춧돌로 사용할 정도로 훼손의 정도가 심하다.
창청은 중국 최초의 우주인 양리웨이(楊利偉·39)가 2003년 10월 “우주공간에서 창청을 볼 수 없었다”고 언급하면서 또다시 화제가 됐다. 진시황이 만든 창청의 명성이 또다시 전 세계에 광고가 된 셈이다. 진시황은 산둥(山東)성 옌타이(燃臺) 항구에도 등장한다. 이곳은 진시황이 말년에 불로장생의 선약을 구하기 위해 바다에 배를 띠우고 신하를 보내는 장면을 움직이는 실물 인형으로 재현해 놓았다고 한다.
1998년에 진시황은 또다시 세계적인 인물로 태어났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중국 방문시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옛 장안)의 병마용갱(坑)을 방문하면서 또다시 유명해졌다. 클린턴 대통령은 부인 힐러리, 딸 첼시, 장모 도로시 로드햄을 대동해 병마용을 방문한뒤 감탄을 연발함으로써 진시황의 명성을 더욱 높였다.
1~3호갱을 통털어 키 178~187cm인 7천여개의 병마용, 목조 전차, 기병용 안마 등은 보는 이들의 숨을 막히게 한다. 우선 병마용이 2천여년전에 이토록 대규모로 만들어졌다는 것과 정교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병마용은 각각의 얼굴 표정이 다르다. 이는 병마용 제작자들이 모두 다른 인물들로 병마용 제작기술을 익혔음을 의미한다. 병마용의 대부분이 갑옷을 입고 손에 창, 긴창, 장(長)병기와 활 등을 든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말들은 실물 크기로 “휘히힝~” 말울음 소리를 내면서 뛰어오를 것처럼 생생하다. 병마용은 2천여년 처음 햇볕을 보는 순간 갑옷에 홍색, 청색 등으로 채색이 된 화려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공기중의 습기, 산소 및 햇볕과 결합하면서 병마용은 점차 검은 우중충한 색깔로 변해갔다. 진시황이 타고 다닌 4마리의 말이 끄는 동(銅)마차도 날렵한 기동성으로 눈길을 끈다. 진시황이 탄 마차는 지붕과 양사방이 철제로 ‘방탄 마차’였음을 보여준다.
2000년 중국에서는 병마용이 진시황과 관계없다는 주장이 나와 논란이 일었다. 이 논란은 아직까지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 우선 병사들이 전차를 중심으로 사열한 병마용 군진(軍陣)이 진시황 당시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사기’(史記) 등 중국사료에는 진시황이 기동력 강한 기병을 활용해 천하를 통일했다고 기록돼 있다는 것이 근거다. 또 병마용 옷 색깔이 국가색과 다르다는 것이다. 진시황은 2003년 장이머우(張藝謀)가 감독한 영화 ‘영웅’(英雄)에서 처럼 검은색을 국가색깔로 정해 의복, 깃발, 휘장 등을 모두 검은색으로 통일했다. 그러나 병마용 병사들은 빨간색·녹색 도포와 파란색·보라색 등의 바지를 입었다. 이대로라면 진시황이 스스로 규정을 어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당시 진나라 장례풍습은 왕이 죽으면 사람과 가축을 옹관에 넣어 순장했음에도 굳이 병마용을 만들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시안(西安)대 고고학과 주임교수 천징위안(陳景元)은 학술잡지 ‘大自然探索(대자연탐색)’1984년 겨울호에 “병마용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라고 쓴 논문 ‘秦俑新探(진용신탐·진병마용의 새탐구)’을 발표했다. 그는 논문에서 “실제 주인은 진시황의 고조할머니인 진선(秦宣)태후이며 이 병마용은 진선태후 유해를 그녀의 고향인 초나라 땅으로 운구하는 장의행렬”이라고 추정했다. 진한(秦漢) 연구 사학자 린젠밍(林劍鳴)도 학술지 ‘원보’(文博) 1985년 제1기에 ‘秦俑之迷’(진용지미=병마용의 수수깨기)란 논문을 발표해 “병마용 출토 병기는 대부분 청동기로 철제무기를 주로 사용한 진시황때의 야금기술 수준과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의혹속에 병마용은 여전히 진시황의 것으로 중국인들은 믿고 싶어한다. 병마용이 진시황 것이 아닐 경우 ‘관광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평가절하되는 것은 불보듯 뻔하다. 병마용은 오늘도 숱한 의혹을 안고 조금씩 발굴에 발굴을 거듭하고 있다.
진시황의 신비성과 상품성을 높이는 다른 유적지는 진시황릉(秦始皇陵)이다. 병마용 박물관 도착 직전 낮은 야산으로 보이는 것이 진시황릉이다. 진시황 즉위때부터 37년에 걸쳐 만들어졌으며 주변의 둘레가 25km 정도 되는 거대 규모다.
동서 485m, 남북 515m, 높이 약 76m로 산처럼 보인다. 진시황릉은 영화에 나올법한 ‘지하궁전’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에 “수은이 흐르는 수백개의 강이 큰 바다를 이루고 있다”고 돼 있다. 지하 궁전 내부는 천상과 지상을 모방해 만들어 졌다. 또 궁전 입구에는 영화 ‘인디아나존스와 최후의 성전’처럼 무단침입자에 대해 가차 없이 화살이 자동 발사되도록 ‘부비 트랩’이 장치돼 있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는 외부인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으로 진시황릉의 신비감을 더 높이고 있다. 2002년 12월에는 진시황릉의 신비를 벗기기 위한 대대적인 과학탐사가 시작됐다. 중국 당국은 진시황릉에 대해 지구물리 종합탐측기술을 이용한 원격탐지를 실시했다. 거액이 투입된 이번 조사에는 지면탄성·파동·자기파·고밀도전자파·중력 등 과학기술부가 개발한 최첨단기술이 총동원됐다. 이는 진시황릉에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고 경계·모양·구조·깊이와 파괴 여부 등을 조사하기 위한 것이다. 
진시황릉 주변에는 ‘지하궁전’이 만들어져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중국은 진시황릉의 뚜껑을 열지는 않을 것이다. 진시황릉의 비밀을 캐는 것은 진시황의 ‘살아있는 전설’을 망가뜨리는 행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진시황을 영원한 전설 속 의신비한 인물로 남기를 바라고 있다. 
이처럼 과거에는 중국인들을 탄압하고 억압한 진시황의 유적이 현재는 중국의 부를 살찌우는 관광자원이 되었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와 같다. 한고조 유방의 정책의 하나인 유교의 숭유(崇儒)로 인해 법가 노선을 걸었던 진시황의 업적이 많이 오인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이라는 나라를 현재에 있게 했으며 제왕학이라 일컫어지는 법가사상을 처음으로 정치에 대입했고 동양의 어떤 제왕보다 능력위주의 인재등용을 하여 짧은 시간동안에 광대한 영토를 차지한 그는 희대의 영웅이자 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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