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물

레오나르도다빈치

2000 머털도사 2007. 9. 10. 02:54
레오나르도다빈치
인간의 세상만사를 관리함에 있어서 자제보다 더 좋은 규칙은 없다. -레오나르도다빈치Leonardo da Vinci
모든 경험은 하나의 아침, 그것을 통해 미지의 세계는 밝아 온다. 경험을 쌓아 올린 사람은 점쟁이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경험이 쌓일수록 말수가 적어지고 슬기를 깨우칠수록 감정을 억제하는 법이다. 경험이 토대가 되지 않은 사색가의 교훈은 허무한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무슨 일이든지 시작을 조심하라. 처음 한 걸음이 정차의 일을 결정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는 당시 12가지 걸작 중 하나인 '최후의 심판'을 8년간의 고생 끝에 완성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10년간 그렸는데, 때로는 너무 일에 열중한 나머지 하루 종일 식사하는 것도 잊어 버렸다. 
보람있게 보낸 하루가 편안한 잠을 가져다주듯이 값지게 쓰여진 인생은 편안한 죽음을 가져다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쇳덩이는 사용하지 않으면 녹이 슬고 물은 썩거나 추위에 얼어붙듯이 재능도 사용하지 않으면 녹슬어 버린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시작이 나쁘면 결과도 나쁘다. 중도에서 좌절되는 일은 대부분 시작이 올바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작이 좋아도 중도에서 마음 늦추면 안 된다. 충분히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되, 일단 계획을 세웠거든 꿋꿋이 나가야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식욕없는 식사는 건강에 해롭듯이, 의욕이 동반되지 않은 공부는 기억을 해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아는 것이 적으면 사랑하는 것도 적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어떤 것이든 그것에 대해 잘 알지 않고서는 사랑하거나 미워할 수 없는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열심히 일한 날에는 잠이 잘 찾아오고, 열심히 일한 일생에는 조용한 죽음이 찾아온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수첩] 
오, 주님, 주님은 우리가 노력이라는 값만 치르면 그 무엇이나 다 허락해 주시는군요. -레오나르도 다빈치 
용기가 생명을 위험한 지경으로 몰고 갈 수 있듯이, 공포심이 때로는 생명을 지켜줄 때도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잘 지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이루게 하는 것처럼 잘 보낸 인생은 행복한 최후를 가져온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장해나 고뇌는 나를 굴복시킬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분투와 노력에 의해 타파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지혜는 경험의 딸이다. 경험에 근거하지 않은 사색가의 교훈을 피하자. 이왕 겪을 일이라면 매도 먼저 맞는 편이 낫다. 인간의 경험은 자연의 모든 움직임이 필연성에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 지혜의 명령이 아니고서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경험을 바탕으로 지혜의 탑을 쌓아 가도록 하자. -레오나르도 다빈치 
처음에 참는 것은 나중에 참는 것보다 쉽다. 처음에는 어떤 사람이든 조심을 해서 참지만 나중엔 그 조심을 조심하지 않아서 참지 못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회화와 조각의 목적은 볼 줄 알게 되는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생애
14세 때 화가·조각가의 공방(工房)에 도제(徒弟)로 들어가 미술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30세 때 밀라노의 지배자에게 자천장(自薦狀)을 제출하고 밀라노로 나갔다. 자천장에는, 모든 종류의 토목공사·축성(築城)·병기의 설계 및 제조에 관해 스스로의 다방면의 재능을 열거한 뒤, 평화로운 때에는 회화(繪畵)·석조조각(石造彫刻)·주조조각(鑄造彫刻)의 기술에 능란함을 첨가하였다. 근 20년간의 밀라노체재 뒤, 프랑스군의 밀라노침공을 기회로 밀라노를 떠나 만토바에서 공비(公妃)의 초상을 그렸고, 베네치아에 들렀다가 피렌체로 되돌아갔다. 
1502년의 여름 동안, 체자레보르지아의 군사토목기사로서 로마냐지방에서 일했다. 보르지아의 실각 뒤 피렌체로 되돌아갔는데, 1506년 밀라노 주재의 프랑스총독 샤를당부아즈의 초빙으로 다시 밀라노로 출동, 루이 12세의 궁정화가 겸 기술자로서 6년간 일했다. 그리고 13년, 교황 레오 10세의 아우의 초청으로 로마로 옮겼는데, 16년에는 프랑수아 1세의 초빙으로 향발, 17년에는 앙부아즈왕성 근교 크루성관(城館)에 입주한 뒤, 갖가지 연구를 했는데, 그는 여기서 67세로 죽을 때까지 평생을 보냈다. 
미술작품
회화작품 중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것은 많지 않다. 어렸을 때 있던 공방시절(제 1 차피렌체시절)에는 스승 및 동문과의 합동작품인 《그리스도의 세례(피렌체의 우피치미술관 소장)》 《지네브라데벤치의 초상(워싱턴의 내셔널갤러리 소장)》 《수태고지(受胎苦知;우피치와 루브르미술관 소장)》와, 미완품인 《3박사(三博士)의 예배(우피치 소장)》 《성(聖)히에로니무스(바티칸미술관 소장)》가 있다. 제 1 차밀라노 시절에는 산타마리아델레그라체성당 식당의 《최후의 만찬》 외에 성프란체스코교회 무원죄회태예배당(無原罪懷胎禮拜堂)을 위한 제단화 《암굴(岩窟)의 성모(루브르미술관 소장)》와, 소묘만이 현존(現存)하는 조각 《스폴차기마상(騎馬像)》이 만들어졌다. 
제 2 차피렌체 체재중에는 미켈란젤로와 경쟁적으로 만들게 되는 판이었던 팔라초베쿄 내의 대벽화 《안기아리의 전투》를 그렸고, 그 뒤는 밀라노·피렌체·로마 등을 돌아다니는 동안에 《모나리자(루브르 소장)》를 그렸고, 제자 프레디스의 《암굴의 성모(런던 내셔널갤러리)》를 지도했고, 그 뒤 《성안나와 성모자》 《세례자 요한(모두 루브르 소장)》을 그렸다. 소묘단계에서 끝난 조각 《트리푸르치오장군 기마상》 등을 추가해도 그의 예술상의 유작(遺作)은 많지 않으나, 미술역사상에 남긴 발자취는 매우 크다. 즉, 회화역사상에서는 원근법 및 해부학(解剖學)의 연구로 콰트로첸토(15세기)의 정밀한 자연묘사를 다시금 추진시켜, 화면의 통일구성 및 윤곽소실묘법(輪郭消失描法)에 의한 입체표현·명암법(明暗法)을 안출해 냄으로써 우미(優美)의 표현을 의도했으며, 조각에서는 남겨 놓은 많은 소묘 작품으로 판단컨대 상(像)은 정지상(靜止像)이 아니고 인마(人馬)의 약동하는 모습을 추구했고, 거대한 브론즈(동상)작품은 역학적으로 만들기 어려워서 2점 모두 미완으로 끝냈다. 
건축의 일에서도, 역시 그의 설계에 의한 건조물은 실현되지는 못했으나 집중식(集中式)교회 건축에 특수한 흥미를 품고 있어서, 세부(細部)의 역학적 구조를 보여주는 습작(習作)을 많이 남겼다. 그는 또 일종의 도시공학에 관한 구상도 지녀, 그것에 따르면 도시를 이중구조(二重構造)로 하되 아래의 도로는 생활물자 운반에, 위의 도로는 사람의 자유로운 보행을 위하여, 또 도로의 너비에 따라서 건조물의 높이는 규제해야 한다고 했으며, 바다나 강 옆에다 도시를 설계함을 이상(理想)으로 삼았다. 어떻든 그의 예술상의 작품은 의외로 적고, 다만 오직 그들 완성품의 근본이 된 소묘(素描)·에스키스(밑그림)류는 방대한 양에 이르고 있어 그가 과작(寡作)의 천재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소묘·에스키스 약 500매, 수고(手稿) 5000페이지가 영국·프랑스·이탈리아·에스파냐 등에 분산되어 소장되어 있다. 에스키스는 200매나 되는 해부도(解剖圖) 외에, 기계공학·수력학·축성·비상(飛翔;비행기) 등에 관한 고안·연구로 가득 차 있다. 그는 늘 손수 만든 소책자를 가지고 다니며 가끔씩 일어나는 단상(斷想)이나 관찰을 기록했고, 그림과 문절(文節)을 혼합해 기록했다. 왼손잡이였던 그는, 그런 수첩에 기록할 때는 문자를 전부 뒤집어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향해서 배열했다. 
그래서 거울에 비침으로써 비로소 정상적(正常的)인 글씨체가 되었으므로 경자(鏡字)라 불렸는데, 이는 연구의 비밀이 드러날 것을 우려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원래 그가 왼손잡이였기 때문이다. 이런 수고류(手稿類) 중에서 회화의 이론과 실기에 관한 부분을 꺼내서 제자가 레오나르도의 《회화론(繪畵論)》 1권을 편집한 일은 유명하며, 그 원본은 바티칸의 교황청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다. 레오나르도와 같은 시대 사람에 의한 전기(傳記)에는 단편적(斷片的)인 것과, 조르조 바자리에 의한 것의 2종류가 있다. 
과학·기술사의 측면에서 본 레오나르도
레오나르도의 수고에는 회화·조각·건축·천문·기상·물리·수학·지리·지질·수력·해부·생리·식물·동물·토목공사·하천운하화(河川運河化) 등을 비롯하여 물건을 들어 올리거나 이동시키는 장치, 관개용(灌漑用) 배수장치, 병기, 자동인형, 비행을 위한 장치 등 많은 분야의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의 원래의 출발은 회화·조각이지만, 그 회화·조각에 대한 관심을 심화하면 할수록 데생 등에 정밀함이 요구되었고, 관찰력은 날카로워졌으며, 그것이 무슨 일이든 철저를 기해서 탐구하지 않으면 사물에 대한 인식을 깊게 할 수가 없다고까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예컨대 인물을 그릴 때에도 인체에 관한 지식의 필요성을 느끼고, 그 지식을 얻기 위하여 해부를 필요로 했다. 그는 수고에서 <정확하고도 완전한 지식을 얻으려고 나는 10여 명의 인체를 해부했으며, 갖가지 지체(肢體) 모두를 도려내어, 그 모세혈관으로 지나는 눈에 띄지 않는 피 외에는 약간의 출혈도 발생하지 않도록, 혈관 주위의 살을 극히 미세한 부분까지 완전하게 떼어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충분한 인식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라고 쓰고 있다. 
이것이 그의 사물에 대한 자세이다. 또 그림의 수법을 수련하는 과정에서는 수학이 필요해졌고, 새가 나는 방법에 관한 연구에서는 무게와 밀도의 관계, 풍압이 날개에 미치는 힘의 영향에 관해 실험했으며, 낙하산 같은 것까지도 고안해냈다. 그는 또 <그저 상상만으로써 자연과 인간 사이의 통역자(通譯者)가 되려고 한 예술가들을 믿지 말라>고 했고, <실험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로써 이론을 검증(檢證)하는 일>이야말로 일반법칙을 세우기 위해서는 중요하다고 갈파했다. 
그는 수고에 씌어 있는 사항의 전체에 걸쳐서 실험을 하였거나 실제로 만들어낸 것은 아니나,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위와 같은 점을 주장하였다. 그는 <자연계의 법칙성을 밝혀나간다는 것은, 자연을 관찰하여 인식을 심화시키고, 그것을 객관적인 이론으로 발전시켜 나아가는 일>이라고 주장하였고, <그런 이론을 끊임없는 실천과 통일적 노력으로 포착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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