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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벨트[ Roosevelt, Franklin Delano ]
2000 머털도사
2007. 9. 10. 02:54
루스벨트 [ Roosevelt, Franklin Delano ] 미국의 제32대 대통령(재임 1933∼1945). |
뉴욕주(州) 하이드파크 출생. 하버드대학교를 졸업, 1904년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하였으며, 1907년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1910년 뉴욕주의 민주당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진출하였다. T.W.윌슨의 대통령선거를 지원해주고, 1913∼1919년 윌슨 정부의 해군차관보로 임명되어 제1차세계대전을 통하여 활약하였고, 베르사유회의에 수행하였다. 1920년 민주당 부통령후보로 지명되어 대통령후보인 J.M.콕스와 함께 국제연맹 지지를 내걸고 싸웠으나, 공화당 대통령후보인 W.G.하딩에게 패하였다. 그 후 다시 변호사로 일하며 보험회사에도 관계하였으나, 1921년 39세의 나이에 소아마비에 걸렸다. 치료 후 체력이 회복되자 1924년 정계로 복귀하였다. 1928년 뉴욕 주지사에 당선되어 2기(期)를 재임하였다. |
1932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자, 그 지명수락연설에서 ‘뉴딜(New Deal)’을 선언하였다. 1929년 이래 몰아닥친 대공황으로 천 수백만에 달하는 실업자를 배출하고 있던 당시 미국의 사정으로서는 뉴딜을 대환영하였고 마침내 H.C.후버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대통령 취임 후에는 강력한 내각을 조직하고 경제공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뉴딜정책을 추진하였다. 통화금융제도의 재건과 통제, 산업 특히 상공업의 통제, 농업의 구제와 통제, 구제사업과 공공사업의 촉진, 정부재정의 절약 및 행정의 과감한 개혁 등으로 성공을 거두어, 국민생활은 점차 안정되어 갔다. |
외교면에서는 소련의 승인, 필리핀의 독립과 함께 호혜통상법(互惠通商法)을 제정하게 하고 공황의 원인이 되었던 국제무역의 불균형을 시정하였고 라틴아메리카 제국(諸國)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선린외교정책(善隣外交政策)을 추진하였으며, 먼로주의를 미국만의 정책으로 삼지 않고 아메리카주(洲) 전체의 외교정책으로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
1936년 대통령에 재선되었고, 1940년 3선되었다. 1935년 유럽 정세가 악화됨에 따라 중립법이 제정되었지만, 원래 국제주의자였던 그는 고립주의를 억제하여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는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후에 적극적으로 영국과 프랑스를 원조하였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眞珠灣)공격을 계기로 참전하였다. 대서양헌장의 발표를 비롯하여 카사블랑카·카이로·테헤란·얄타 등의 연합국 회의에서 전쟁의 결정적 지도권을 장악하여 영국의 총리 W.L.S.처칠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지도적 역할을 다하고 전쟁종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44년 대통령에 4선되고 국제연합 구상을 구체화하는 데 노력하였으나, 1945년 4월 세계대전의 종결을 보지 못하고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
미국의 제32대 대통령(1933~45). |
별칭은 F. D. R. 미국 최초의 4선 대통령으로서, 오늘날 미국 행정부의 기능과 역할은 그의 통치방식에 힘입은 바 크다. |
국내적으로는 1930년대의 대공황 타개를 위하여 뉴딜정책을 추진했고, 대외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연합국을 지도함으로써 이후 미국이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
하이드파크에서 제임스 델러노 루스벨트의 외아들로 태어난 프랭클린은 청빈하고 기품있는 평온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
가정교사들에게서 교육을 받다가 14세가 되자 매사추세츠 주 그라튼 학교에 입학했으며 공동체의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그리스도교적 실천을 교육받았다. |
1900년 하버드대학교로 진학한 루스벨트에게 교내활동은 교과과정보다 더 흥미로운 것이었지만, 정통 자본주의의 자유방임적 본질에 얼마만큼의 국가규제를 용인하려는 수정자본주의적 경향에 깊은 영향을 받는 한편, 뛰어난 진보적 대통령이었던 친척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영향을 받아 정치에 매료되고 있었다. |
1905년 3월 17일 프랭클린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조카로 뉴욕 시에서 인보문제(隣保問題)를 담당하고 있던 엘러너 루스벨트와 결혼했다. |
프랭클린은 1910년 뉴욕 주 더치스 군(郡) 민주당 지도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주 상원의원 선거에 나서게 되었고 공화당의 분열사태와 널리 알려진 이름 덕택에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
1921년 8월 메릴랜드 주의 신용예금회사에서 부회장을 지내던 루스벨트에게 갑자기 척수성 소아마비 증세가 나타났다. |
어머니는 그에게 은퇴하여 하이드파크로 돌아올 것을 권고했지만, 아내 엘러너는 오히려 정치활동을 계속하는 것이 남편의 사기진작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고 프랭클린이 정치집회에 참석할 때면 그의 눈과 귀 역할을 했다. |
엘러너는 남편이 사망할 때까지 이러한 보살핌을 계속했으며, 장차 그녀가 활발한 정치·사회 활동을 펼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
루스벨트는 웜스프링스에 머물면서 광천욕(鑛泉浴)으로 물리치료를 받은 뒤 2차례에 걸쳐 뉴욕 주지사를 지내게 된다. |
1930년 선거에서 대승을 거둔 루스벨트는 1932년이 되자 가장 유력한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떠올랐다. |
당시의 민주당 당헌에 따르면 전당대회에서 총투표의 2/3를 얻은 사람만이 후보자로 선정되도록 정하고 있었으므로 선두주자는 대개 애를 먹기 일쑤였는데, 텍사스 주 출신으로 하원의장에 오른 존 낸스 가너가 캘리포니아 주 예비선거에서 승리했을 때 루스벨트 측의 사정은 악화되었다. |
루스벨트는 1932년 전당대회의 초반기에 과반수 지지를 확보하고 있었으나 가너와 선임 뉴욕 주지사였던 앨 스미스가 제휴하자 곤경에 빠졌다. |
가너는 3차 투표에서 루스벨트를 지원하기로 결심했고 자신은 부통령후보로 지명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