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물
나폴레옹
2000 머털도사
2007. 9. 10. 02:49
나폴레옹 |
지중해의 코르시카 섬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순수한 코르시카인으로서, p. di 파올리(paoli: 1726-1807)를 우상처럼 여겨, 프랑스를 조국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며, 따분한 나날을 책을 읽으며 보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에도 그는 오직 코르시카에 관한 생각밖에 없었으나, 92년 파올리의 좁은 민족 독립 사상과 대립하였기 때문에 결국 프랑스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 해 반혁명군과 영국 함대가 점령한 툴롱항의 공방전에서 지휘관으로 눈부신 공을 세우고 일약 육군 소장이 되었다. 96년에 조세핀과 결혼하고,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
그는 이어 97년 캄포 포르미오 조약을 체결하고 오스트리아를 제압하기 위하여 라인 강 왼쪽 연안을 장악하였다. 이 무렵부터 나폴레옹 몰락 때까지의 프랑스와 유럽 여러 나라의 전쟁을 '나폴레옹 전쟁'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차츰 침략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한편, 그는 행정 조직과 재정의 개혁, 종교 정책, 나폴레옹 법전편찬, 교육 제도의 재정비 등에 의하여 혁명의 후의 사회를 안정시켰고, 또 승전으로 이를 잘 지켰으므로 그의 정권은 소위 보나파르티즘의 형태를 갖추어 신흥 지주, 상공업 부르주아, 소농민의 지지를 받았다. 1802년 종신 통령에 임명되고, 1804년에 황제가 되어 제 1제정을 시작하였다. 그의 제정은 겉으로는 입헌제를 취했으나, 실제로는 국민의 정치 활동과 언론, 출판의 자유를 억누르는 독재 정치였다. 1805년, 프랑스는 트라팔가르해전에서 패하여 영국만은 정복하지 못하였으므로, 대영 정책으로서 그는 1806-07년에 대륙봉쇄령을 내렸다. 그러나 여기에 복종하지 않은 포르투갈에 출병하였다가 패전하였고,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는 50만 명의 인명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다.1813년, 정복당한 여러 나라가 해방 전쟁을 일으켜 이들과 싸웠으나, 프랑스군은 그 해 10월 라이프치히에서 패전하였다. 1814년에는 파리가 함락되었으며, 그는 엘바 섬에서 유형 당하였으나, 이듬해 파리에 돌아와 다시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 뒤 전제 제정을 자유주의화 하려던 꿈도 이루지 못한 때 같은 해 6월 워털루에서 영국의 웰링턴 장군에게 패함으로써 백일 천하가 되었으며, 다시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그 곳에서 병으로 죽었다. |
성장(napoleon에서 심충적으로) |
나폴레옹은 코르시카라는 섬에서 1769년에 태어났다.이름은 나폴레옹(이탈리아 어로 황야의 사자라는 뜻) 보나파르트. 가난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코르시카섬은 14세기 이래 이탈리아의 제노바령이었는데 18세기 초기부터 주민들이 독립운동을 시작하였고, 18세기중엽부터는 p.파올리가 주도하였다. 보나파르트가(家)는 16세기에 코르시카로 이주하여 서부의 아야초의 소(小)귀족 지주가 된 뒤, 나폴레옹의 아버지인 샤를 보나파르트는 레티치아 라모리노와 결혼하여 파올리의 민족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그러나 제노바가 코르시카를 프랑스에 양도하였기 때문에 섬사람들은 프랑스군에게 저항하다가 1768년에 패배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프랑스에 귀순했으므로 1779년 국왕의 급비(給費)를 받아 나폴레옹을 본토의 브리엔 군사학교에 보냈고, 84년에는 파리사관학교로 진학시켰다. |
프랑스 혁명 (업적에서 심충적으로) |
1789년에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코르시카에서 국민병으로 활약했는데, 독립파인 파올리와 대립하게 되자, 93년 마르세유로 이주했으며 거기서 그는 편협한 애향심을 버리고 <혁명프랑스>에다가 운명을 맡겼다. 열강이 혁명에 대하여 공세를 취하자, 영국·에스파냐 함대가 폐쇄중인 툴롱항을 포격하여 해방시켰고, 그 후 여단장이 되었으며, 다시 왕당파의 방데미에르의 반란을 진압·진정시켰다. 96년 3월 조세핀과 결혼하고, 27세인 그는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 군대는 원래 이탈리아에서의 오스트리아군 견제를 목적으로 편성된 것으로, 장비와 규율이 엉망이었으나, 1년간 연속된 전투 끝에 여러 곳에서 승리를 거두고, 97년 캄포포르미오조약을 맺고 치잘피나공화국을 창설함으로써, 프랑스 국경 밖의 프랑스땅을 확보하였다. 나폴레옹의 출현으로 인하여 그 때까지 방어적이었던 혁명전쟁은 침략전쟁으로 변질되었다. 총재정부(總裁政府) 부내(部內)에서도 대영(對英)전략으로 인도항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이집트원정이 고려되고 있었고, 이 작전도 나폴레옹에게 맡겨졌다. 그는 98년 5월에 툴롱을 출발하여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고 <피라미드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프랑스 함대는 아부키르만에서 영국 함대에 의하여 괴멸되었다. 유럽에서 제2대 프랑스대동맹이 결성된 것을 알게 되자, 그는 군대를 남기고 99년 10월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총재정부는 부르주아 세력과 보수세력에게 협공을 당했기 때문에 정치적 안정성이 흔들렸고, 총재 시에예스 등은 정체(政體)변혁을 위하여 군사력을 필요로 하여 동년 11월 나폴레옹과 결탁하여 의회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로써 프랑스혁명기(期)는 끝이 나게 되었다. |
제1집정(執政)에서 황제로 |
1799년의 헌법 제정 단계 때부터 그는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혁명의 사회적 성과를 보증하는 부르주아적 사회 안정을 지키기 위하여 강력한 정부를 염원하였다. 입법기관은 4원(四院)으로 분할되었고, 제1집정의 행정권이 강하여 그는 그 전제적 권력으로써 재정(財政) 확립을 위하여 프랑스은행을 설립하고 행정·사법 제도를 개혁하였으며 경찰력을 강화하였고, 1804년에는 민법전(民法典), 즉 나폴레옹법전 편찬을 끝내었다. 그는 또 곧 오스트리아군에 대해서 제2이탈리아전쟁을 일으켜 승리함으로써 로마교황과의 종교협약을 성립시켰고, 이어서 영국과 아미앵조약을 맺음으로써 종신집정이 되었고, 스위스 및 독일 제후(諸侯)에게까지 지배의 손을 뻗치고, 국내에서는 왕당파를 탄압하더니 1804년 5월 황제로 추대된 뒤 이탈리아 왕을 겸했으며, 그 해 12월 2일 노트르담에서 대관식(그림)을 거행하였다. 이것이 제1제정(帝政)의 시작이다. |
유럽정복 |
대륙의 여러 나라는 혁명의 영향, 프랑스의 경제 진출을 막기 위하여 나폴레옹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 군대는 아직 봉건적으로 편성되어 있어서, 혁명이 창출한 근대적인 대국민군(大國民軍)에게 당해 낼 수는 없었다. 영국은 대륙시장을 자국의 국민산업을 위하여 확보하는 점에서 유럽 여러 나라와 대프랑스동맹을 맺어야만 할 위치에 있었다. 아미앵조약이 영국에 의하여 파기되고 1805년 제3 대프랑스대동맹이 성립되자, 그는 대영전략으로서 영국 본토 상륙작전을 계획, 불로뉴를 중심으로 <대륙군(大陸軍)>을 결집시켰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이 출동했으므로, 울름회전(會戰)에서 이를 격파하기는 했으나 트라팔가해전에서 프랑스함대는 영국의 넬슨에게 격파되어, 결국 그 상륙작전은 좌절되었다. 한편,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황제의 양군은 합류하려고 서둘렀으므로 나폴레옹군은 진격을 계속하여 빈을 점령하고, 곧 아우스테를리츠의 <삼제회전(三帝會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또, 독일에 대해서도 1806년에 16개의 영방(領邦)을 라인동맹으로 결성함으로써 신성로마제국을 해체시켰다. 이에 프로이센은 프랑스에 대하여 공격적으로 되어버려 제4 대프랑스대동맹의 계기를 만들었다. 나폴레옹군은 동맹군을 여러 차례 격파한뒤, 베를린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러시아군을 추격해서 폴란드로 침입, 바르샤바대공국을 설립시키고 나서 1807년 러시아와 틸지트조약을 맺었다. 그 전에 그는 대륙봉쇄를 호령하는 베를린칙령을 발포하였다. 그것은 영국의 산업제품 및 식민지 물산(物産)을 수입하는 대륙시장을 폐쇄할 목적으로 발포된 것으로, 대영 전략의 최후수단이었다. 그 뒤 그의 군사적·정치적 과제는 이 대륙체제를 유지하는 데에 있었는데, 대륙봉쇄는 본래 영국을 기점(起點)으로 북으로부터 남쪽으로 흐르는 경제유통을 프랑스제국(帝國)으로부터 동쪽으로 흐르는 흐름으로 바꾸고자 했던 것이었는데, 봉쇄정책을 저버린 포르투갈에 대한 원정은 우선 에스파냐 점령, 그 뒤로는 에스파냐독립전쟁으로 발전하였고, 1809년 제5 대프랑스대동맹에 대해서는 오스트리아로 원정을 하였고, 몇 차례의 큰 전쟁을 한 뒤 강화(講和)를 하였다. |
몰락 (백일천하) |
1806년에서 10년까지 프랑스 제국은 전성기를 맞아, 국내외적으로 경제성장과 판도(版圖) 확장이 이어졌다. 나폴레옹도 40세 전후가 되면서 몸이 비대해지고 청년기의 예리함을 상실하였다. 궁정은 옛제도의 화려함을 띠게 되었고, 귀족 제도가 되살아났으며, 추종자들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그는 정복지에다가 가족이나 혈연관계가 있는 부장(部將)을 원수(元首)로 파견해 놓았으니, 이른바 가족체제가 완성되었다. 그렇게 되지 않은 나라는 프랑스와 동맹국관계에 있는 나라였는데, 그 중에서도 러시아는 10년 말부터 반프랑스적 태도를 취하였다. 그는 국내 경제의 불황을 이유로 출병을 연기하고 있었으나, 결국 12년 6월 러시아원정길을 떠났다. 동맹국군을 합친 50만 병력으로 그 해 9월 모스크바에 도달했으나 러시아의 초토작전(焦土作戰)에 대응하지도 못한 채, 10월 무렵 퇴각을 시작하여 원정은 참담한 결과로 끝이 났다. |
13년 에스파냐,러시아, 특히 프로이센에서는 나폴레옹 독재에 대한 민족의식에 눈을 떠, 국내개혁에 몰두하게 되었고, 제6 대프랑스대동맹이 민족해방을 위해서 결성되었다. 독일은 라이프치히에서의 해방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14년 1월 동맹군은 프랑스로 침입하여 파리를 함락시키고 그 해 4월에 나폴레옹을 퇴위시켜 엘바섬으로 유배하였다. 그 후 부르봉 왕조 루이 18세의 왕정복고(王政復古)가 이루어졌고, 혁명에 의해서 획득한 것을 잃게 될 것을 우려한 부르주아와 농민들은 15년 3월 엘바섬에서 탈출·귀국한 나폴레옹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빈회의에 참가 중이던 여러 나라는 이런 사태에 대응하기 위하여 군대를 출동시켰고, 같은 해 6월 워털루전투에서 참패한 나폴례옹은 남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유배되었다 |
나폴레옹 유해 |
앙발리드 |
나폴레옹의 유해가 안치된 앙발리드는 원래 루이 14세가 자신이 일으킨 전쟁으로 폐인이 된 수 천명의 병사들을 위하여 세운 요양소였다. 앙발리드는 1671∼1676년에 세워졌는데, 엄격하리만큼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장식이 없다. 이곳의 요양소로서의 기능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나폴레옹의 유해는 그가 유배지인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숨을 거둔지 19년 후인 1841년에 이곳, 앙발리드 중앙에 있는 돔 교회당으로 이장되었다. 지금은 군사 박물관, 생루이 데 쟁발리드 교회당, 그리고 돔 교회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군사 박 물관에는 전쟁기념품, 그림, 벽화등이 전시되어 있고, 생루이 데 쟁발리드 교회당에는 나폴레옹이 정복한 나라들의 국기들이 깃발로 장식되어 있다. |
나폴레옹의 대리석관 |
나폴레옹은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천재이며, 책략에 뛰어난 영웅이었다. 잇따른 전쟁을 통해 전세계에 용맹을 떨쳤으나 워털루 싸움에 패하여 영국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 후 대서양의 세인 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었다가 1821년 5월 5일 숨을 거두었다. 나폴레옹이 죽은지 19년 후인 1840년 12월 15일 루이 필립왕은 나폴레옹의 유해를 파리로 송환 시킨다. 나폴레옹의 유해는 일곱겹의 관속에 넣어졌는데 첫 번째 관은 주석, 두번째는 마호가니, 세번째와 네번째는 납, 다섯번째는 흑단, 여섯번째는 떡갈나무로 만들어졌다. 러시아에서 운반되 어 만들어진 일곱번째 관은 대리석 관이며 녹색의 화강암 위에 얹혀있다. 이 대좌 밑 포석에는 그가 이끈 싸움터의 이름과 행적등이 돌아가면서 새겨져 있고, 유해 주위 에는 그의 형제들과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장군들의 묘가 둘러싸고 있다. |
관련 전쟁 |
1797~1815년 프랑스혁명 당시 프랑스가 나폴레옹 1세(재위 1804∼14/15)의 지휘하에 유럽의 여러나라와 싸운 전쟁의 총칭. 처음에는 프랑스혁명을 방위하는 전쟁의 성격을 띠었으나, 차차 침략적인 것으로 변하여 나폴레옹은 유럽 제국(諸國)과 60 |
명언 : " 오랜동안에 걸쳐 함께한 경험과 노력의 결과로서 이루어진 형태의 |
정부가 아니면 결코 뿌리를 내릴 수 없다. " |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769-1821 > |
나폴레옹 : N a p o l e o n 1 세. 본명은 Napoleon Bonaparte 이고 별칭은 Le Caporal이다. 프랑스 장군이자 제 1부통령(1799-1804). 프랑스와 서유럽 여러나라 제도에 오래도록 영향을 끼친 많은 개혁을 이루어 냈고 프랑스의 군사적 팽창에 가장 큰 열정을 쏟았다. 그가 몰락했을 때 프랑스 영토는 1789년 혁명 때보다 줄어들었지만 그가 살아있는 동안, 그리고 조카인 나폴레옹 3세가 다스린 제 2제정이 막을 내릴때까지 그는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존경받았다. 나폴레옹은 1769년 8월15일 코르시카의 아작시오에서 카를로 부오나파르테와 레티치아 라몰리노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태어나기 바로 전 제노바는 코르시카를 프랑스에 할양했다. 그 뒤 코르시카 사람들은 프랑스의 점령에 저항했고 카를로 역시 파스콸레 파울리가 이끄는 코르시카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나 파올리가 망명하자 카를로는 프랑스인과 타협했다. |
코르시카 총독의 비호를 받은 그는 1771년 아작시오 지방법원의 판사 보좌관으로 임명되었고 1778년 에는 위로 두 아들인 조제프와 나폴레옹을 콜레주 도툉에 입학시켰다. 나폴레옹은 프랑스로 간 뒤 한 동안 스스로를 외국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9세 때부터 프랑스에서 교육받았으나 코르시카 기질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으며 교육과 독서를 통해 확실한 18세기 사람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오툉, 브리엔, 파리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가 파리에 있던 1785년 2월, 아버지는 어려운 집안 살림을 남겨 놓은채 숨을 거두었고 장남은 아니었지만 나폴레옹은 16세도 안된 나이에 가장역할을 떠 맡았다. 그 해 9월 58명 가운데 42등으로 파리의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했고 젊은 포병장교를 위한 훈련기관인 라 페르 (La Fere)연대에 포병소위로 임관했다. 연대가 주둔한 발랑스에서 계속 교육을 받으며 특히 전략과 전술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1788년 6월에 연대에 복귀하였는데 그때는 이미 프랑스 혁명의 불안한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볼테르와 루소를 읽은 나폴레옹은 정치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나 직업장교로서 급격한 사회개혁에 대한 필요는 느끼지 못했던것 같다. |
대표적인 전쟁 : 나폴레옹 전쟁 연표 |
1769년 탄생 ~ 1821년 사망 |
1789년 7월 프랑스 혁명 일어남 |
1794년 3월 나폴레옹,이탈리아원정군에 근무. |
1796년 3월 나폴레옹, 이탈리아원정군 사령관이 됨. |
4월 이탈리아 전투 개시 |
11월 아르콜레전투 |
1797년 2월 만토아 점령 |
1798년 5월 나폴레옹, 이집트 원정출발 |
7월 피라미드 전투 |
12월 제2 대프랑스 대동맹 |
1799년 11월 브뤼메르 쿠데타, 임시 집정 정부 성립 |
1800년 5월 이탈리아 전투 |
1802년 1월 나폴레옹,이탈리아 공화국 대통령이 되다. |
8월 나폴레옹, 종신 집정이 되다. |
1804년 3월 민법전 발포 |
12월 나폴레옹, 대관식 |
1805년 3월 나폴레옹, 이탈리아왕이 되다. |
8월 제3대 프랑스대동맹 |
10월 울름 전투, 트라팔가르 해전 |
1806년 8월 신성로마제국 붕괴 |
10월 예나 전투, 나폴레옹 베를린 입성 |
11월 베를린 칙령, 대륙봉쇄개시 |
1808년 2월 나폴레옹, 로마합병 |
5월 에스파냐독립전쟁개시 |
12월 나폴레옹, 마드리드에 들어가다. |
1809년 5월 빈 입성 |
1810년 7월 네덜란드 합병 |
12월 러시아, 대륙봉쇄 파기 |
1812년 6월 러시아원정 |
9월 보로디노전투, 모스크바 입성 |
10월 모스크바에서 퇴각 |
1813년 3월 독일해방 개시 |
8월 드레스덴 전투 |
10월 라이프치히 전투 |
1814년 1월 프랑스전투 개시 |
2월 몽트르전투 |
3월 파리 입성 |
4월 나폴레옹 퇴위 |
5월 나폴레옹, 엘비섬으로 유배당함, 프랑스 제 1왕정 복고 |
10월 나폴레옹, 세인트 헬레나섬으로 유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