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팅 게일 |
1820년 5월 12일. 이탈리아의 플로렌스(지금의 피렌체) 에서 태어남. |
1821년 영국으로 귀국, 5세까지 리이허어스트에서 자람. |
1837년 2월 7일,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환자를 위해 일하기로 결심 |
1850년 도이칠란트에서 약 2주일 동안 자선 병원을 견학 |
1854년 10월 21일, 간호원 38명과 함께 런던 출발, 11월 4일, 스쿠타리에 도착, 활동을 시작 |
1859년 나이팅게일 간호 학교 설립 |
1860년 나이팅게일 간호 학교 제 1회 졸업생 냄 |
1863년 스위스 앙리 뒤낭 주동으로 유럽 16개 국 대표가 모여 적십자 국제 위원회 조직, 결성 |
1864년 8월 제네바 조약 성립, 국제 적십자사 창립됨. |
1865년 나이팅게일 간호 학교 졸업생 존스를 리버푸울의 구빈원에 파견함. |
1883년 빅토리아 여왕에게 적십자 훈장을 받음. |
1907년 국제 적십자사로부터 최고의 감사장을 보내 옴 |
1910년 8월 13일 오후 2시, 바아크렌의 자기 집에서 죽음. |
유언에 따라 리이허어스트 근처의 이스트 웰로우 가족. 묘지에 묻힘. |
영국의 부유한 가정의 딸로, 부모가 이탈리아 여행 중 이탈리아 피렌체 출생. 영국과 독일에서 간호사 교육을 받았다. 1844년 이후 의료시설에 강한 관심을 가지고, 유럽 ·이집트 등지를 견학, 귀국 후 정규 간호교육을 받고 런던 숙녀병원의 간호부장이 되었다. 1854년 크림전쟁의 참상에 관한 보도에 자극되어 34명의 간호사를 데리고 이스탄불의 위스퀴다르로 가서 야전병원장으로 활약하였다. 간호사 직제의 확립과 의료 보급의 집중 관리, 오수 처리 등으로 의료 효율을 일신하여 ‘광명의 천사(The Lady with the Lamp)’로 불렸다. |
귀국 후 1856년에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직접 병원개혁안을 건의한 바 있고, 1860년에는 나이팅게일 간호사양성소(Nightingale Home)를 창설하여 각국의 모범이 되었다. 그후 의료구호제도에 관해 영국 육군을 비롯하여 국내의 각 조직 및 외국 정부로부터의 자문에 응하였다. 저서로 《병원에 관한 노트》 《간호노트》가 있는데, 각국어로 번역되어 간호법이나 간호사 양성의 기초가 되고 있다. 국제적십자에서는 ‘나이팅게일상(賞)’을 마련하여 매년 세계 각국의 우수한 간호사를 선발, 표창하고 있다. ‘나이팅게일 선서’는 간호사의 좌우명으로 유명하다 |
나이팅게일 (1820 ~ 1910) |
백의의 천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은 영국의 부유한 가정의 딸로 태어나 좋은 가정환경 속에서 고등교육을 받았다. 그녀의 부모가 이탈리아을 여행할 때 간호교육의 중요성을 절감, 영국과 독일의 카이저스베르트에서 간호학을 공부, 간호사 교육을 받았다. |
1844년 이후 의료시설에 강한 관심을 가지고, 유럽·이집트 등지를 견학, 귀국 후 정규 간호교육을 받고(바라던 간호사가 된 것은 30세 때였다), 런던 숙녀병원의 간호부장이 되었다. 1854년 크림전쟁의 참상에 관한 보도에 자극되어 국민모금을 통해 기금을 모은 뒤, 38명의 간호사들과 함께 이스탄불의 스쿠타리로 가서(11월 4일 스쿠타리에 도착) 야전병원에서 활약하였다. 환자쪽 입장을 살린 야전병원 개혁을 단행하여, 불과 몇 개월 내에 사망률을 반감시켰다. |
바바크라바와 잉커멘의 전투에서부터 부상당한 군인들의 진료를 시작하여 10,000여명의 부상자들에게 병원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하였는데, 단 5개월 동안 나이팅게일은 병원에서의 사망률을 42%에서 2%로 줄였고, 그녀의 초인간적인 불굴의 노력은 전 군인들을 감동시켜 '크림의 천사'라는 칭찬을 받기까지 하였다(그녀의 활동은 후에 앙리 뒤낭의 적십자 창설의 동기가 되기도 하였으며, 그녀의 숭고한 희생과 업적으로 크림전쟁의 승리를 이끌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나이팅게일은 간호사 직제의 확립과 의료 보급의 집중 관리, 오수 처리 등으로 의료 효율을 일신하기도 하였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광명의 천사(The Lady with the Lamp)어둠을 밝혀준 여인'으로 불렀다. |
귀국 후 1856년에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직접 병원개혁안을 건의한 바 있고, 크림전쟁 종군 때의 공로로 받은 표창금과 국민으로부터 받은 기부금을 바탕으로 1860년에는 런던의 성(聖)토마스 병원내에 나이팅게일 간호사양성소(Nightingale Home)를 창설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간호학교의 모범이 되었다. 세심(細心)·절제·공평·인내를 좌우명으로 간호교육을 체계화하고, 간호사 교육은 간호사가 함으로써, 간호를 종교로부터 독립시켰다. 이 제도는 영국으로부터 세계 각국으로 퍼져 나갔으며, 현대의 간호교육의 기초가 되었다. 그리고 나이팅게일은 의료구호제도에 관해 영국 육군을 비롯하여 국내의 각 조직 및 외국 정부로부터의 자문에 응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
나이팅게일은 오늘날의 간호사가 있게 한 장본인이지만, 사실 그녀는 전쟁터에서 단 2년 동안만 일했을 뿐, 그때 얻은 병으로 그후 50년 동안을 환자로 지냈다. 몸은 비록 병자였으나, 문필 활동은 오히려 왕성해서 저작은 약 200권, 서한이 약 1만 200통이나 될 정도였다. 그녀의 업적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녀의 업적을 기념해서 1920년 나이팅게일 기장이 제정되었으며, 국제적십자에서는 '나이팅게일상(賞)'을 마련하여 매년 세계 각국의 우수한 간호사를 선발하여 수상하고 있다. '나이팅게일 선서'(http://users.unitel.co.kr/~nurse/night.htm)는 간호사의 좌우명으로도 유명하다. 저서로 "병원에 관한 노트", "간호 노트" 등이 있다. |
<나이팅게일 선서> |
나는 일생을 의롭게 살며 |
전문 간호직에 최선을 다할것을 |
하느님과 여러분 앞에 선서합니다. |
나는 인간의 생명에 해로운 일은 |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 않겠습니다. |
나는 간호의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
전력을 다하겠으며, 간호하면서 알게 된 |
개인이나 가족의 사정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
나는 성심으로 보건의료인과 협조하겠으며 |
나의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
헌신하겠습니다. |